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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명상협회, 화두공안 통관 6차 관문 성료

설 명절의 들뜬 소란함이 가라앉은 2월의 끝자락, 차가운 대기 속에는 이미 낡은 겨울을 밀어내는 서늘하고도 부드러운 봄의 온기가 숨어 있다. 계절이 묵묵히 제때를 찾아 꺾이듯, 마음의 궤적을 좇는 구도의 길에도 낡은 허울을 벗어던져야 할 전환의 순간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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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22일, 스승을 향해 세배를 올리며 문을 연 화두공안 통관의 여섯 번째 마당은 이렇듯 낡은 앎을 부수고 새로운 뼈대를 세우는 쇄신의 시공간이었다. '무두선(無頭禪)'은, 그 이름처럼 어떠한 단계나 우두머리조차 허락하지 않는 아득하고도 투명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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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선(禪)의 자리는 설명이 더해질수록 그 맑은 본질이 망가지는 법이다. "내가 너무 친절해져서 이 클래스가 망할지도 모르겠다"는 스승의 농담 섞인 탄식에는, 체험의 영역인 깨달음을 자꾸만 지식으로 쪼개어 삼키려는 현대인들을 향한 짙은 연민이 배어 있다.

어린아이가 처음 걸음마를 뗄 때 보행의 역학을 머리로 계산하지 않고 온몸의 감각을 대지에 부딪히며 일어서듯, 진리에 닿기 위해서는 사유의 늪을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어리석은 중생들은 텅 빈 하얀 백지 위를 어지럽히는 까만 글씨, 이른바 '검정콩'에 지독하게 매달린다. 소화되지 못한 활자와 지식은 영혼의 허기를 채워주기는커녕 거대한 인지적 소화불량을 일으킬 뿐이다. 이 앎에 대한 얄팍한 갈망을 과감히 뱉어내고, 이미 삼킨 지식의 흔적조차 하얗게 지워버리는 결단이 바로 무두선의 진정한 출발점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공부의 단계를 상징하는 '사다리의 철학'과 마주하게 된다. 무아에서 공(空)으로, 다시 무(無)와 중도로 이어지는 불교의 오랜 사유 체계는 한 칸씩 수고롭게 밟고 올라가는 사다리와 같았다.

그러나 선종의 벼락같은 지혜는 이 지난한 사다리를 뛰어넘어, 문을 여는 순간 곧바로 목적지의 꼭대기에 다다르는 엘리베이터의 시스템을 지향한다. 나아가 사다리는 단지 위로만 향하는 도구가 아니다. 때로는 사다리를 옆으로 뉘어 굳어진 관점을 낯설게 비틀어 보아야 하며, 대승의 보살들이 그러했듯 심연의 용궁으로 내려가 가장 깊은 무의식의 원판을 직면해야만 한다.

그리고 궁극의 목적지에 도달한 그 서늘한 찰나, 자신이 타고 올라온 그 사다리마저 허공을 향해 가차 없이 걷어차 버려야 한다. 목적을 다한 도구에 얽매이는 순간, 앎은 다시 우리를 가두는 감옥이 되기 때문이다.

지식을 비워낸 자리는 현실과 동떨어진 텅 빈 고립이 아니라, 가장 치열하고 생생한 일상의 알아차림으로 채워진다. 오전의 예열을 거후 시작된 '입실(入室)'은, 18명의 수행자가 각자의 화두를 쥐고 스승 앞에서 자신의 변화를 날것 그대로 증명해 내는 고군분투의 처절한 현장이었다.

헛깨비 같은 활자에 매달려 있는 것은 아닌지 날카로운 점검이 오가는 그 역동적인 에너지는, 우리가 마주하는 현대 문명 속에서도 고스란히 숨 쉬어야 한다. 복잡한 키오스크 앞에서 느끼는 당혹감이나, 인공지능이 쏟아내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도 의식의 중심을 잃지 않고 '낯설게 하기'를 실천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낡은 종교의 언어를 넘어 일상의 내면소통으로 뻗어 나가는 맑고 투명한 명상의 생생한 박동이다.

사다리에 매달려 안전을 구걸하는 한, 우리는 영원히 중력의 노예로 남을 뿐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발밑의 사다리를 걷어차고 완벽한 불확실성의 허공을 향해 기꺼이 몸을 던지는 용기만이 우리를 얽매인 자아로부터 해방시킨다.

다가오는 3월 15일, 우리는 '사다리에 매달릴 것인가, 걷어찰 것인가'라는 서늘한 화두를 품고 다시 그 투명한 백지의 시공간으로 모여들 것이다. 뱃속을 무겁게 짓누르던 지식의 검정콩을 모두 토해내고, 스스로 온전한 사다리가 되어 세상을 거침없이 가로지르는 위대한 수행의 궤적은 이미 찬란하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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